제5장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강 할아버지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손자를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오너라.”
두 사람은 강 회장님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팔은 어쩌다 다친 게냐?”
회장님의 눈썰미는 예리했다. 김지연의 팔에 난 찰과상을 본 것이다. 어제 그 불량배 두 명에게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면서 다친 상처였다.
김지연은 얌전하게 미소 지으며 교묘하게 핵심을 피해 대답했다.
“할아버님, 안 아파요.”
회장님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옆에 있는 강태준을 추궁했다.
“네가 말해 보거라. 지연이 팔의 상처는 어쩌다 생긴 거지?”
강태준은 그제야 김지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옥처럼 하얀 오른팔에 선명하게 난 찰과상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할아버님의 추궁에 그는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젯밤이 떠올랐다. 그녀를 몸 아래 깔고 괴롭힐 때, 그는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정말 잘 참는군.
회장님이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내가 다친 것도 모르고, 남편 노릇을 어떻게 하는 게야? 네 아내를 네가 아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와서 아껴주기라도 바라는 거냐?”
김지연이 거들었다.
“할아버님, 정말 안 아파서 말 안 한 거예요.”
회장님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너희 둘 말이다. 언제쯤 증손주를 안겨 줄 테냐?”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강태준의 전화가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들고 서재를 나갔다.
강정우에게서 온 전화였다.
“강 대표님, 지시하신 일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모님께서는 최근 특별히 접촉한 사람은 없었고, 이민준이라는 사람과 2분간 통화한 것 외에는 어젯밤 예성 아가씨에게 물건을 전해주러 클럽에 갔다가 경찰서에 들렀습니다. 그 후 경찰관 한 분의 개인 차를 타고 청원동 빌라로 돌아오셨습니다.”
강정우는 숨을 몰아쉬며 말을 쏟아내고는 덧붙였다. “아, 그 이민준이라는 아이는 중학생이고, 사모님께서는 찾던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뒤로는 연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강태준이 의아한 듯 물었다. “경찰서에는 왜 갔지?”
강정우는 숨을 죽였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사모님께서 어젯밤에… 성폭행을 당할 뻔하셨습니다.”
강태준의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했다. 어제 돌아왔을 때의 이상한 모습과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그 괴상한 옷차림이 떠오르며 속이 뒤집혔다.
이 여자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이런 일을 당했으면 가장 먼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남편을 장식품으로 아는 건가?
감히 누구라고 강태준의 아내를 건드려. 아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사건 경위 상세하게 보고해.”
강정우는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대표의 어마어마한 분노에 몸을 떨었다.
“강 대표님, 그 불량배 두 명은 이미 잡혀 들어갔고, 이 일이 뉴스에도 났습니다. 제가 카톡으로 링크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강 비서에게서 링크 하나가 도착했다.
김지연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 강태준은 소파 한쪽에 앉아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휴대폰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실에는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작은아버님.”
그녀는 어른들께 차례로 인사를 하고 얌전히 강태준의 옆자리에 앉아 쿠션을 하나 품에 안았다.
차에서 내내 토하고, 서재에서 할아버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눈 터라 그녀는 지금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그와 부부 연기를 하고 있었다.
정지미는 김지연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그녀의 목덜미 아래 붉은 자국까지 발견하고는 웃으며 물었다.
“지연이 상태를 보니 우리 강씨 집안에 경사가 있으려나? 임신 초기 석 달은 조심해야 한다.”
그 말이 나오자 집안의 사용인들까지 모두 하던 일을 멈췄고, 방 안의 수십 개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쏠렸다.
강태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가 차에서 내내 토했으니 의심을 사지 않을 리 없었다.
갑자기 화제의 중심이 되자 김지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얼굴을 붉힌 채 해명했다.
“어머님, 아니에요. 오늘은 그냥 멀미를 좀 해서요.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정지미는 기대했던 대답을 듣지 못해 조금 실망했지만, 다정하게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아, 너희 둘 다 젊은데 아이 걱정은 없지. 불편하면 방에 들어가서 좀 쉬렴. 밥 먹을 때 태준이더러 올라가서 부르라고 할게.”
김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좀 앉아 있으면 나아질 거예요.”
강태준은 그녀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말 방에 안 들어가도 괜찮겠어?”
“네.”
강예성이 위층에서 내려오다 거실의 대화를 듣고는 피식 웃었다.
“알도 못 낳는 닭인데 뭘. 3년 동안 애도 못 낳았으면서 이제 와서 낳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정지미가 계단 쪽을 쏘아보며 꾸짖었다.
“말버릇이 그게 뭐니? 위아래도 없이. 얼른 와서 새언니한테 사과하지 못해?”
김지연은 강예성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강예성과 윤진아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자신이 강태준과 결혼한 날부터 이 시누이의 입에서 고운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친구 편을 들며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했고, 아무도 없을 때는 더 기고만장했다.
김지연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자기편을 들어주니, 정지미의 체면을 봐서라도 강예성과 다투지 않았다.
강예성은 억지로 끌려와 사과하면서도 콧방귀를 뀌며 성의 없이 미안하다고 한마디 툭 던졌다.
김지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강태준이 추궁했다.
“네가 어릴 때부터 배운 예절이 고작 그따위로 사과하는 거였나?”
김지연은 조금 의외였다. 강예성이 자신에게 무례하게 군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그는 늘 못 본 척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자기편을 들며 그녀를 위해 나서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알 수 없었다.
강예성은 어릴 때부터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유독 오빠만은 무서워했다.
강태준의 굳은 포커페이스를 보자 그제야 공손하게 김지연을 향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강태준은 마치 병아리를 잡듯 그녀의 뒷덜미를 잡고 창고로 끌고 갔다.
강예성은 겁에 질려 허둥지둥 소리쳤다.
“엄마, 엄마, 엄마! 오빠가 또 나 때리려고 해….”
정지미는 김지연을 보며 예의 바르게 미소 지었다. “저 아이는 정말 혼 좀 나야 해. 태준이만이 쟤를 잡을 수 있거든.”
이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창고에서 강예성의 비명 몇 번이 들려왔다.
정지미의 눈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녀가 떠보듯 물었다.
“지연아, 네가 한번 가보지 않을래?”
김지연은 그들 남매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시어머니가 나서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냥 가서 말리는 척 시늉만 하면 되겠지. 설마 강태준이 정말로 친동생을 때리기야 하겠어?
그녀가 창고 문 앞에 도착해 막 노크를 하려던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강태준: “그 애가 네 하녀야? 네가 뭔데 한밤중에 물건을 가져오라고 시켜?”
강예성: “그거야 오빠가 걔한테 보석을 많이 사줬으니까 그렇지! 내가 그거 하나 빌려서 기 좀 살리겠다는데 그게 뭐 어때서? 오빠가 그 물건들을 진아한테 줬어 봐. 진아가 나한테 뭘 못 빌려줬겠어? 그럼 내가 걔더러 가져오라고 시키기나 했겠냐고!”
안에서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어제 너희 클럽에 있을 때, 진아도 있었어?”
강예성은 추궁에 조금 긴장한 듯 더듬거렸다. “아, 아니. 어제 진아는 오빠랑 같이 있었잖아.”
강태준이 코로 흥, 소리를 내더니 경고했다. “앞으로 그 애 부려먹지 마. 알았어?”
문이 안에서부터 열렸다. 강태준은 문밖에 멍하니 서 있는 김지연을 발견했다. 그녀의 안색이 아까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정말 위층에 올라가서 쉬지 않아도 괜찮겠어?”
그가 다시 물었다.
김지연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식사할 시간이에요.”
강예성이 창고에서 씩씩거리며 나왔다. 이마가 벌겋게 부어오른 걸 보니 딱밤이라도 맞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김지연과 어깨를 스쳐 지나가며 일부러 그녀를 툭 쳤다.
김지연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지려던 순간, 허리에 갑자기 손 하나가 감기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몸을 바로 세우자마자 거리를 두려는 듯 그에게서 멀어졌다.
강태준은 화가 나서 다시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왜 날 피해?”
그가 잊었을까 봐 김지연이 상기시켜 주었다. “강 대표님, 우리 이혼했어요. 거리를 둬야죠.”
